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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00년 전, 압록강 건넌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11.04.19 조회 : 1641
 
경술국치 100년의 해인 올해를 떠나보내기 전에 우리 시대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1세기 전인 오늘(1910년 12월 30일) 칼바람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넜던 6형제들. 이들은 60여 명의 식솔들을 데리고 삼삼오오 흩어져 썰매를 타거나 마차 또는 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가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다시 모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년 만주 유하현 횡도촌의 대고산 밑에서 무장독립운동의 전초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삼한갑족(三韓甲族·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일컬음) 집안에서 성장한 우당 이회영(1867∼1932) 일가.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자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아들 이유원이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이다.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조선시대 6조의 장관)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
 
국가지도층이 이 지경... 대한민국 제대로 설 수 있나?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국정원장 등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군 미필자들입니다. 그리고 각료 등 정부 요직에 있는 일부 인사들의 필수 과목은 탈세·부동산 투기·군대 기피·표절·위장전입 등입니다. 국가 지도층이 이 지경인데, 대한민국이 제대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에게 우당 선생의 정신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의 우당 기념관에서 이회형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마주 앉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최근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우당 이회영 평전을 연재하기 시작한 김 전 관장은 이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가혹하리만치 철저하게 실천한 선생을 회고했다.
 
"명동 YWCA 빌딩에서부터 외환은행 본점까지 모두 할아버지 일가의 땅이었죠. 둘째형 이석영 선생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양주에서 서울까지 왔다고 합니다. 6형제의 재산을 처분했더니 당시 돈으로 40만 원이었어요. 현재의 화폐 가치로 산출하기 어렵지만 황소 값으로 환산하면 6백억 원, 땅값으로 따지면 2조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명동 7필지의 4천 평 땅값만 해도 지금 돈으로 5천억 원입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에 비견되는 대부호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전 원장의 말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을 때 이동녕·이상설과 함께 격렬하게 항의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던 우당 선생은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경술국치 이후 건영·석영·철영·시영·호영 등 형제(이회영 선생은 넷째)들을 설득해서 전 재산을 팔아 망명 길에 올랐다. 재산뿐만 아니라 조상께 제사지내는 위토(位土)까지 처분했다.
 
"우당 선생은 집의 노비들도 다 해방시켰습니다. 그 중 일부가 망명 길에 따라왔는데, 만주에 도착한 뒤 '오늘부터 당신들은 노비가 아니라 독립군'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도 한 노비가 우당 선생의 부름에 "예이-"라고 응대하자 회초리를 들어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했다는 말도 전해들었습니다. 노예근성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 전 원장이 말하자 김 전 관장이 당시 시대상을 보충설명했다.
 
"당시에는 반상·적서·남녀·지역 차별이 극심했죠. 특히 양반 가문이면 이를 거부할 수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게다가 부친이 이조판서였습니다. 우당 선생이 그런 차별 의식을 스스로 깨뜨리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양명학과 자유주의적인 신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상동교회에서 최초의 신식결혼
 
 
 
 
 
양명학을 공부했던 우당 선생의 봉건적 반상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주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원장은 "부친 몰래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의 장례식을 치르고, 인천에 재가를 시킬 정도로 몸으로 실천하는 차별철폐론자였다"고 말했다.
 
당시 우당 선생을 이해하려면 '상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남대문 상동교회를 알아야 한다.
 
 
 
 
이종찬 "우당은 우리 가계에서 좀 이단아였죠. 고종이 벼슬을 준다고 했는데 거부했어요. 그리고 남대문 상동교회에 다녔습니다. 그곳의 첫 안수 목사는 전덕기 목사였는데 남대문 시장의 숯장수 아들이었어요. 우당은 그와 가장 친한 동지였습니다.
 
그 당시 연동교회에선 상놈이 먼저 장로가 됐는데 양반이 다 나와서 묘동교회를 세울 정도로 반상 차별이 심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당은 전덕기 목사와 동지가 되고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당 선생은 교회에서 재혼을 했는데 한국 최초의 신식결혼이었습니다."
 
김삼웅 "그야말로 삼한갑족의 대 가문 자제로 태어나서 시서화와 전각에 일가견을 가졌습니다. 동생은 17살 때 과거 급제했는데 형은 과거를 팽개치고 상동교회의 학감이 됐습니다. 그리고 구국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철학적 배경이 양명학입니다. 지행합일이 양명학의 핵심이지요. 우당 선생은 상동교회를 다니면서 재야지식인들과 어울려서 제도권을 이탈한 것입니다."
 
우당 선생은 학감으로 취임한 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덕기 목사와 함께 교회 내 청년조직을 동원해 무효투쟁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그는 또 1907년 조남승·남익 형제와 함께 고종 황제에게 접근해서, 밀지를 받아낸 뒤에 만국평화회의 때 이상설과 이준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했다. 이상설 선생을 정사로 추천한 인물이 바로 우당 선생이었다.
 
김 "상동교회는 근대 민족운동의 요람입니다. 헤이그 특사가 좌절됐는데 그 당시에 우당 선생이 신민회를 결성했습니다. 새로운 백성이라는 뜻인데 근대 봉건시대의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어요. 신민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우당 선생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망명한 우당 선생 일가는 처분한 재산을 몽땅 털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우선 만주 대고산 노천회의를 열고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기구를 만들었다. 주경야독하고, 한편으로는 조선의 망명객들을 경계하는 중국인들과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김 "처음에 바로 무장학교를 세운 것은 아니고 경학사를 세워서 미리 가 있던 조선족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신흥중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그쪽에서 배척이 심했죠. 60명이 한꺼번에 마차를 타고 오니까, 혹시 일본 앞잡이들이 아니냐고 경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중국인 가게에서는 이들에게 물건도 안 팔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학사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마적 떼들이 습격해서 농지와 곡식을 빼앗고, 연이어 흉년이 들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듯하다"고 이 전 원장은 전했다.
 
김산 등 3500명 독립운동가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1912년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30년 폐교될 때까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 350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들은 특히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등 여러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신흥무관학교의 학비는 무료였습니다, 숙식도 무상으로 제공했죠. 사실 독립운동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에게 돈 내고 공부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우당 선생 일가가 마련해온 재산은 3년 만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1913년에 독립자금을 마련하려고 잠시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선생이 만주로 떠날 때 나중에 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당 선생을 피해 다니거나 모른 체 했답니다. 세상이 바뀐 거지요."
 
김 "그래서 당시 우당 선생은 전략을 수정해 고종 망명 계획을 세웁니다. 고종 측근이자, 일제가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절했던 민영달에게 5만 원을 받아서 고종이 북경에 거처할 임시 행궁을 마련했죠. 고종을 망명시키면 돈을 내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하지만 일제가 그걸 눈치채고 식혜에 독약을 타서 고종을 시혜했습니다. 어쨌든 우당은 잠시 귀국해 불교의 만해 한용운과 천도교의 손병희 등 4대 종파 지도자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학술적인 자료가 없어서 그러는데, 아마도 당시에 3·1 운동을 계획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기획하지 않았더라도, 큰 그림을 그리고 만주로 되돌아갔을 겁니다."
 
잠시 귀국한 우당은 종로경찰서 일본 형사에게 붙잡히기도 했으나 15일 정도 구류를 산 뒤에 풀려났다. 악명을 떨치던 일본 형사였으나 우당 선생이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풀어준 것이다. 사실 우당 선생은 신민회·경학사·신흥무관학교 등을 주도적으로 설립했으면서도 직책을 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운형 선생이 만들었던 <중앙일보>는 우당 선생이 서거한 뒤에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이면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이 "우당 선생은 어떤 자리든 '장'을 맡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직책은 상동교회 청년학교 학감입니다."
 
아나키스트인 우당은 '한국판 체 게바라'
 
 
 
 
 
김 "참자유의 표상이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대개 이름을 남기지 않습니다. 부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행동하는 이들입니다.
 
이 "그렇죠. 우당 선생은 철저한 아나키스트였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논쟁 때도 임정보다는 '자유연합적 독립운동본부'를 결성해야만 다양한 정파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할아버지는 그 때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도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천명한 적은 없지만 기존의 틀을 거부했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요소가 많았습니다. 쿠바 정부에 참여했다가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볼리비아로 가서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우당 선생과 교류했던 루쉰도 사실상 아나키스트였습니다. 단재도 그렇고. 이런 경향은 세계 지성들의 공통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국가를 강화해서 민중을 탄압해서는 안된다는 정신 말입니다."
 
 
 
 
김 "아나키즘의 본질은 무권력·자치·자주 등입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려 했지만, 우당 선생은 일제를 권력으로 생각하고 식민지배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아나키스트들은 백범 김구 선생과도 좀 엇갈립니다. 이분들은 권력 자체를 미워했습니다. '우리는 제국주의 권력과 싸운다,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동지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백범 선생은 '일본 놈들은 무조건 믿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김 "임시정부를 만들 때도 그런 논란에 휩싸이죠. 우당 선생은 임시정부보다는 '자유연합적 독립운동본부'를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부 자체가 권력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임시정부는 분란에 휩싸이게 되는 데, 우당이 주장했던 자유연합기지가 건설됐다면 만주 무장투쟁 세력과 미주 대표,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운동가들이 다 참여하는 좀 더 광범위한 연합체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죠. 우당은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뒤에 신채호 선생과 북경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죠."
 
기록에 따르면 우당 선생은 1923년 중국 후난성에 농민들의 이상촌을 세워 자유협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이듬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운동자연맹을 결성했다. 1925년에는 비밀결사조직인 다물단을 조직해 일본 밀정을 숙청했다. 1929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자 할 때 젊은 아나키스트들을 파견했다. 1931년에는 중국 남부에서 남화인연맹을 조직했고 한중합작으로 흑색공포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격렬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삼한갑족의 집안에서 성장해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썼고, 치열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우당 선생. 하지만 그와 가족들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김 "북경에 집을 장만했는데 그 전셋집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거처가 됐어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우당 선생 집에서 며칠 묶었느냐가 많이 회자됐다고 합니다. 훈장 다는 것처럼 여겼지요. 그런데 우당의 부인 자서전을 보면 하루를 점심 한 끼로 때우고 한겨울에도 이틀에 한 번꼴로 불을 때고 그랬나 봐요.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꾸역꾸역 독립운동가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심산 자서전도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심산이 우당의 아들에게 산책 하자고 하니 아들이 안 나간다고 했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겁니다. 전당포에 맡긴 것이죠. 그래서 심산이 외투를 주고 식대도 줬다고 합니다."
 
이 "우리 어머니도 시집을 거기로 갔습니다. 신혼 초에 수많은 사람들을 다 뒷바라지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신념에 따라 기득권 던진 자유인
 
 
 
 
 
 
우당 선생은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거사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오 노부요시 암살하려고 1932년 11월 황포에서 대련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지만 대련 앞바다에서 둘째 형 아들의 밀고로 잡혔다. 대련 경찰서 형사대와 광동군 헌병들은 우당 선생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했다. 결국, 그해 11월 17일, 우당 선생은 67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일제는 우당 선생에 대한 고문의 흔적을 감추려고 곧바로 화장했다.
 
청소년을 위한 '우당 전기'의 책 제목은 <이회영, 내 것을 버려 모두를 구하다>이다. 우당 선생이 형제들의 재산을 모두 처분해 압록강을 건넜던 100년 후 오늘.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내 것만을 취하기 위한 주먹질'이 난무하고, 연평도 포격 침탈 등으로 인해 북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우당 선생이 이 시대에 살아계신다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1시간 30분여의 대담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우당 선생의 정신에 대해 정리의 말씀을 부탁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생각으로 꾸준하게 행동했습니다. 신념에 따라 자신의 기득권을 던진 자유인이자 지식인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삶이 더욱 소중합니다. 저의 부친도 이런 말을 했어요.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시신을 못 찾은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그나마 귀국해서 내 뼈를 조국에 묻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라고 말입니다."(이종찬)
 
"우당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입니다. 본인뿐 아니라 가문 자체가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권력자들, 특히 대통령을 포함해 국가 예산을 자기 호주머니 돈인 양 나눠주는 사람들. 자기 형 지역에 3년 동안 1조씩이나 나눠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또 국민의 희생 위에 성장했으면서 돈을 해외로 빼돌리고 2∼3세 세습까지 하는 재벌들. 이는 우당 선생의 숭고한 생애와 배치됩니다. 오늘날의 황당한 국가 지도자들에게 우당의 정신을 보여주고 싶습니다."(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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